한때 서촌에 거주한 이중섭 화가에 대한 글 1편이며 추후 2편이 있을 예정입니다.
= 목차 =
■ 서촌에서의 5개월
■ 그리고 또 그리다
■ 야마모토 마사코
■ 한번의 재회 그리고 죽음
■ 글을 마치며
※참고로 '이중섭 이야기 ②(일본편)'는 2023.8.6 서촌의봄 사이트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 서촌에서의 5개월
"이중섭 평전 (최열, 돌베게출판사, 2014년, 946p)"에 따르면 이중섭은 1954년 6월 초순 인왕산 자락 누상동의 김이석 (소설가)을 찾아가 곁방살이를 하면서 서촌생활을 시작한다. 한 달 후인 7월 13일 역시 누상동의 정치열 (고향친구) 소유 이층집의 2층으로 이사하여 같은 해 11.1일 노고산 기슭 신수동의 이광석 (이종사촌 형)의 옆집으로 이사하기까지 거주한다.
이중섭이 당시 일본에 있는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쓴 편지 (일본어로 작성됐다)에 그 내용이 있다. 이 글에서 이중섭의 편지를 소개하는 경우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다빈치출판사, 2000년, 255p)' 내용을 인용했다.
" 그 후 건강 상태는 어떠한가요? 며칠 전 (7월 4일)에 보낸 편지는 받았으리라 믿소. =중략= 오늘 두시경 소품전의 작품 제작을 위해 친구의 집 이 층으로 이사를 하오. 서울은 방 얻기가 힘들어 지금까지 고생을 했소만...요행히 친구가 널찍한 자기 이 층 방을 그냥 빌려준다기에 오늘 이사를 하오. 이번 이사를 하고 나면 꼬박꼬박 편지를 내리라.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정양에만 힘을 쓰면서 기다려주구려 = 이하 생략= "
그림들은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이중섭의 편지에 그려진 것으로 서울 개인전 (다음 해인 1955년 1월 미도파백화점에서 개최된다)을 준비하는 이중섭 본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이중섭 평전 등에 따르면 해당 그림은 신수동 시기 편지에 동봉된 것으로 보이나 서촌시절의 모습도 비슷했으리라 본다.
이중섭의 서촌 거주지 (친구 정치열의 집) 관련해서 이중섭 관련 일부 책에서 공터 또는 신축 건물이 들어서서 원래 건물이 없어졌다고 설명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과거 문화재청이 이중섭의 편지 만을 근거로 잘못된 주소를 등록 문화재로 지정했다 취소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한 필지였던 대지가 분할 되고 건물이 추가로 들어서면서 발생한 오해인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이중섭 거주 당시 건물은 그대로 남아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진입로가 좁아지고 주변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서 주소 만으로 찾기는 어렵다.
이중섭 거주지로 추정되는 건물은 정남향에 야외 테라스가 있어 (이중섭 거주 당시 주변에 건물도 없었겠고) 그림 그리기에 안성맞춤인 환경으로 보이며 이중섭의 편지에도 그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 남덕 군 (아내의 한국 이름) 잘 있소? 7월 4일, 7월 11일 자 두 번의 편지를 잘 받았는지요? 오늘이 7월 13일 이오. 영진 군 (조카, 누상동 2층 집에서 함께 거주)과 함께 친구가 빌려주는 밝고 조용하고 제작에는 안성맞춤인 훌륭한 집 이 층으로 이사를 하오. 기뻐해주구려. 내일부터는 혼자서 서울에선 최초의 소품전을 위한 제작에 들어가오. 그립고 가장 사랑한 남덕 군, 진심을 다해서 한없는 응원을 부탁하오. '아고리 군 (이중섭의 애칭), 힘을 내라'고 = 이하 생략 = "
서울 전시전을 위한 그림을 그리는 것 외 이중섭의 서촌생활에 대해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다만 인근 수성동계곡과 인왕산을 자주 간듯하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그 내용이 있다.
" 나의 소중한 특등으로 귀여운 남덕, 그 후에 더위를 견뎌내면서 어느 정도 건강이 좋아졌쇼? 태현이와 태성이도 더위에 지치지 않고 잘 놀고 있는지요. = 중략 = 아빠도 팬티까지 벗어 던지고 일에 열중하고 있소. 아침저녁 언제나 집 뒤의 바위 산, 풀 덤불 있는 맑은 물에 몸을 씻고 마음을 밝고 강하게 하고 있소. 어제 저녁(13일) 하도 달이 밝기에 몸을 씻고 바위 산 마루에 혼자 올라가...밝은 달을 향해...당신과 아이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훌륭한 표현을 다짐했소.
= 이하 생략 = "
■ 그리고 또 그리다
이중섭 평전 등 이중섭 관련 책에 따르면 이중섭의 유작은 최대 500~600점 정도로 추정되며 그 중 유화 같은 정식 작품은 60점 내외고 나머지는 드로잉 (스케치, 엽서화, 은지화 등)이다. 이와 관련해서 이중섭의 친구인 구상 시인이 남긴 글을 소개한다. 원 출처는 1986년 중앙일보 연속 기고문 '내가 아는 이중섭 5' 이며 이 글에서는 평전을 인용했다.
" = 중략 = 중섭은 그렇듯 호구나 거처의 마련도 없으면서 놀랍게도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려 남겼다. 판잣집 골방,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여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노동을 하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 종이, 또는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다.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충무,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전전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나 현재 이중섭 그림들을 보는 것은 쉽지 않다. 이와 관련해서 "황소의 혼을 사로잡은 이중섭 (최석태, 현실문화, 2015년, 207p)" 내용을 잠시 소개한다.
" 이중섭의 작품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지 못하고 개인 소장품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중요한 화가의 그림을 한자리에 모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주요 미술관에 가더라도 이중섭의 그림을 서너 점 이상은 볼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이 글을 준비하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과 '덕수궁관'에서 유화와 은지화를 합쳐 10점 이하의 원본 들을 겨우 보았다. 아래 그림들을 포함해서 원본 그림들을 더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은 '이건희컬렉션젼'을 전시 중인데 근 현대 국내 화가 (김환기, 김수근, 이중섭 등)의 작품 70 여점을 포함하고 있다. 이중섭의 그림은 함께 사진에 담은 김수근의 그림에 비해 무척 작다. 사실 김환기 등 다른 화가들에 비해 김수근의 그림도 작은 편에 속한다. 그래서 이중섭 그림을 보며 생활이 참 어려웠겠다는 생각 한편으로 보다 큰 화폭에 그릴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면 더 좋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야마모토 마사코
2차 세계대전 중인 1945년 4월 어느 날 26살의 일본 여자가 현해탄을 건너 한국으로 온다. 1938년 도쿄의 미술 학교에서 선후배로 만난 조선인 남자와 만나기 위해 서다. 한 달 뒤 둘은 원산 (현재 북한 지역)에서 부부의 연을 맺고 그녀 '야마모토 마사코'는 7년 간 이중섭의 아내 '이남덕'으로 살아간다.
"계간미술 38호 (1986년 여름호, 중앙일보사 발행)"의 이남덕 여사 인터뷰 "이젠 모두 지나가버린 얘기니까 괜찮습니다" (이하 이남덕 여사 인터뷰)에 있는 첫 만남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한국인 대담자)
"어떤 인연으로 이중섭을 만나게 되었읍니까"
(야마모토 마사코)
"저는 주인보다 2년 후배였읍니다.
= 중략 =
어느날 학교 가운데 뜰에서 쉬는 시간에 남학생들이 배구 경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마음에 드는 한 학생이 있었읍니다.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청년이었죠. 그때는 그가 조선사람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그는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요. 권투도 잘했고 철봉, 뜀박질 등을 멋있게 해냈죠. 그뿐 아니라 노래도 잘 불렀죠. 가창력이 뛰어났고 제법 정통적으로 노래를 불렀읍니다. 아마 저뿐이 아니라 다른 여학생들도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눈치였읍니다.
그러던 어느날 실기수업이 끝나고, 붓을 빨게 되었는데 옆에서 그도 붓을 빨고 있었죠. 그때 우리들은 단 둘뿐이었읍니다. 그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어요. 그 때부터 다방 같은데에서 자주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중 남자가 여자의 발을 만지는 장면은 실제 있었던 일인데 이중섭이 연인인 마사코에게 보낸 엽서에 있는 그림이다. 발에 상처를 입은 마사코를 간호해주는 본인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신혼의 단 꿈은 잠시였고 다른 사람들처럼 이중섭과 마사코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든다. 일본의 패전과 조선의 해방, 남북 분단, 서로 다른 체제의 고착, 6.25 전쟁, 피난 생활이 이어진다. 이중섭 가족 (그 사이 두 아이가 태어났다)은 월남하여 부산과 서귀포 등에서 2년 가까이 힘들게 생활을 이어가다 도저히 안되어서 아내와 두 아이들만 아내의 친정인 일본으로 떠나게 된다. 이중섭은 4년 후인 41세에 사망할 때까지 헤어진 가족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한편 그의 작품에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게 반영된다.
이남덕 여사 인터뷰를 한번 더 소개한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떠나던 날을 회고한 내용이다.
(한국인 대담자)
"언제 어떻게 떠나셨읍니까?"
(야마모토 마사코)
"확실한 일자는 기억 못합니다만 52년 7월이었읍니다. 무더운 여름이었고 부두에 주인과 양명문선생 (시인, 이중섭 지인) 그리고 영진도련님 (이중섭 조카)이 전송 나왔읍니다. 저는 고개를 숙이고 한없이 울기만 했읍니다. 가엾은 주인을, 의지가지없는 그사람을 혼자 남겨두고 떠난다는게...언제 끝날지도 모를 전쟁터에 외톨이로 남겨둔다는게..."
■ 한번의 재회 그리고 죽음
처음 그림인 '돌아오지 않는 강'은 이중섭 생의 마지막 해인 1956년 작품으로 북한에 남겨두고 온 홀 어머니를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다른 그림 '구상네 가족'은 절친인 시인 구상 가족의 단란한 모습을 지켜보는 이중섭의 고독한 자화상이다.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급기야 고생한 피난 시절을 가족이 함께하는 즐거운 여행으로 변모 시킨다.
아내와 아이들이 떠난 1년 후 이중섭은 국교 단절로 일부 경제 교류만 가능했던 일본에 가서 가족과 재회한다. 첫 재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관련 내용을 담고 있는 책 "황소의 혼을 사로잡은 이중섭 (최석태, 현실문화)" 내용 일부를 소개한다.
"한국전쟁이 휴전될 무렵인 1953년 7월 말, 주위 친구들과 지유텐 시절 (일본유학시절)의 지인들, 그리고 처가의 도움으로 선원증을 발급받은 이중섭은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 중략 = 그리고 일주일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일본에 잠시만 머문다는 조건으로 출국했던 까닭에 가족들과 함께 더 머물고 싶어도 이를 어겼다가는 체포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중략 = 이후 이중섭은 다시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기 위해 애썼습니다.
= 중략 = 이중섭은 가족을 만나려 했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합니다."
이중섭 관련 책들에 따르면 친정으로 돌아간 야마모토 마사코는 남편의 생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서적 무역업을 도모하다 사기를 당해 큰 빛을 지고 건강까지 악화된다. 한편 서촌에서 열심히 준비한 이중섭의 서울 개인전은 성공적이었으나 정작 판매된 그림들 다수가 수금이 안되어 가족의 재회를 위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실패한다.
1956년 9월 6일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41세의 이중섭이 병환으로 사망한다. 병원은 사망 환자의 보호자가 나타나지 않아 3일 동안 무연고자로 분류했다. 뒤늦게 화장을 마친 뼛가루 중 일부는 '망우리묘지 ( 현 망우리공원, 고유번호 103535")에, 일부는 마지막까지 거주한 정릉계곡에 뿌려졌고, 일부는 1년 후 친구인 구상 시인이 일본을 방문하여 아내에게 전달했다.
망우리묘지 (현 망우리공원)는 이번에 처음 가봤는데 예상한 모습은 아니었다. 가족이나 친구 또는 연인들이 산책하기 좋은 자연휴양림 같은 모습이었다. 이중섭 묘지를 포함해서 근 현대사의 역사 속 인물들 (안창호 등)에 대한 안내와 무덤 관리 등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중섭 사망 당시 제작한 묘비의 조각 그림 (당시 23살 조각가 차근호가 이중섭이 그리워했을 두 아이를 표현했다)은 지금도 선명하다.
■ 글을 마치며
지난번에 시인 (윤동주)을 다루었으니 이번에는 화가가 좋겠다는 상인이 가질 수 있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들러 이중섭 관련 책들 중 비교적 얇은 2권을 골랐다. 서가에 꽂혀있는 이중섭 평전 (거의 1,000페이지 분량이다)을 쳐다보며 이 책을 사는 일은 없겠지 했는데 나중에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고 미술관에 가서 원본 그림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이중섭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황소' 원본 그림을 보러 간 어느 미술관에서 한 층을 가득 채운 모조품을 보고 막막해진 느낌과 비슷했다 (해당 미술관은 원본을 소장하고 있음에도 모조품만 전시하고 있었다)
게다가 처음에는 이중섭과 아내 두 사람 모두에게 오해를 했다. 이중섭에 대한 오해는 예술가로서 훌륭할지 몰라도 남편과 아버지라는 역할은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지점이다.
상인의 시각으로 볼 때 이중섭은 본인의 직업 (스스로 '화공' 이란 표현을 좋아했다)에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상적인 시기였다면 직업의 결과물 (그림)을 통해 생계를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중섭 그림은 현재 수십억에 거래되기도 하는데 이중섭 생존 시에도 분명히 돈이 되었을 걸로 추정된다. 다만 완성된 작품에 대한 관리는 부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상품 (그림)을 적정한 가격에 판매하고 판매 대금을 적기에 회수하는 일은 생산자 (화가)가 아닌 상인의 일이다. 이중섭에게 훌륭한 예술가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상인이 되라는 것은 과도한 요구이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다만 이중섭 옆에 상인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는 점은 아쉽다.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에 대한 오해는 생활력이 부족한 예술가 남편을 홀로 남겨두고 일본으로 떠난 게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냐는 지점이다. 이중섭의 죽음이란 결과를 놓고 볼 때 비판할 수 있겠으나 본인보다는 어린 두 아이를 살리기 위해 엄마로서 내린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놀랍게도 올해 102세인 야마모토 마사코는 지금도 이중섭의 아내로 살아가고 있다.
그림의 인물은 이중섭 본인인데 남아있는 유일한 자화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섭 편지를 한번 더 소개하며 글을 마칠까 한다. 일본에서 가족과 짧은 재회를 하고 한국에 돌아온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다.
"나의 멋진 현처, 나의 귀여운 남덕
나만의 소중한 사람이여
= 중략 =
지금은 초가을. 모든 것이 열매 맺는 소중한 시기요. 우리 가족 넷이서 단란하게 손에 손을 잡고, 힘차게 대지를 밟으면서 정확한 눈, 눈, 눈으로 모든 것을 분명하게 응시합시다.
= 중략 =
돈은 편리한 것이긴 하지만, 돈이 반드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못하오. 중요한 건 참 인간성의 일치요. 비록 가난하더라도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확고부동한 부부의 사랑 그것이오. 서로가 열렬히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한다면 행복은 우리 네 가족의 것이 아니겠소. 안심하시오. 가난해도 끄떡없는 우리 네 가족의 멋진 미래를 확신하고 마음을 밝게 가집시다.
서로 참으로 사랑하고, 더욱더 사랑해서, 하나가 되어 올바르게, 힘차게 살아봅시다. 진심으로 나를 믿고 기뻐해주구려. 화공 대향 (이중섭의 호)은 정신을 가다듬고 현실적인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테니 끈기 있게 기다려봐주오. 남덕의 귀여운 모든 것을 힘껏 안고 긴 입맞춤을 보내오. 사흘에 한 번은 편지를 받고 싶은데... 보내주기를.
= 이하 생략 = "
(상인이 쓴 이중섭 이야기 1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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