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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친구들



서촌과 인연이 있는 역사 속 인물로 윤동주 시인을 처음 택했다. 결과적으로 볼 때 잘못된 선택이었다. 알고 보니 서촌에 거주한 게 1~4개월 정도고 뚜렷한 자취가 남아있지 않아서 어제의 서촌을 대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윤동주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그의 친구들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방문한 장소, 읽은 책을 중심으로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 목차 =


■ 윤동주 하숙집터


■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 윤동주기념관


■ 윤동주평전 (송몽규, 강처중)



 

■ 윤동주 하숙집터

(종로구 누상동 9번지)



윤동주 하숙집 터는 박노수 미술관에서 수성동 계곡 가는 길 중간에 있는데 윤동주가 살던 당시의 건물은 아니고 그 터에 나중에 지은 주택이다.


뒤에 소개할 송우혜 작가의 윤동주평전(이하 평전)에 따르면 윤동주가 서촌 누상동 소설가 김송의 하숙집에 머무른 건 연희전문(현 연세대학교) 4학년인 1941년 5월에서 9월 사이다. 여름방학에 고향인 북간도(현재의 연변)에 1~2개월 다녀왔을 수 있고 9월 초 북아현동으로 하숙을 옮겼으니 서촌에 거주한 건 2~4개월 정도로 추정된다.


함께 하숙한 윤동주와 정병욱(윤동주의 연대 2년 후배)은 아침에는 서촌의 뒷산인 인왕산을 자주 산책하고 학교 수업 후에는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로 와서 도보로 충무로, 명동, 을지로, 청계천, 종로 등을 순례 하며 서점이나 음악 다방, 영화관 등도 종종 들른 것 같다. 서촌에서의 하숙 생활은 집 주인 김송을 감시해온 고등계 형사가 윤동주와 정병욱에게 감시의 손길을 뻗치면서 끝나게 된다.


역시 평전에 따르면 윤동주가 서촌과 인연을 맺은 해인 1941년에 쓴 작품은 모두 17편인데 윤동주의 대표적인 시가 많다. '서시', '또 다른 고향', '십자가' '별헤는 밤'. '새벽이 올 때까지' '간판없는 거리' 등이다.


그 중에서 '간판없는 거리'는 윤동주가 학교 수업을 마치고 다른데 들렀다가 서촌 누상동 하숙집에 오는 과정 같다. 또한 '바람이 불어'는 시기적으로 서촌에서 쓴 시가 확실히 맞다. 해당 시를 여기서 소개한다. 참고로 이 글에서 윤동주의 시를 소개하는 경우 현재의 국어 표기법을 기준으로 하되 이해 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일부 표현은 원문의 표기법을 그대로 따랐다.



바람이불어


(1941.6.2)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가,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가,


단 한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발이 반석우에 섯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발이 언덕우에 섯다.



 

■ 윤동주문학관, 시인의 언덕

(종로구 청운동 3-100번지)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윤동주문학관을 찾았다. 종로문화재단 사이트에 따르면 2012년 문을 연 윤동주문학관은 인왕산자락에 방치되어 있던 청운수도가압장과 물탱크를 의미있게 변모시킨 공간이다. 아쉬운 점은 윤동주의 유품은 적은 편이다. 이유는 유족들이 뒤에 소개할 연세대학교 내 윤동주기념관에 그의 유품 대부분을 기증한 까닭이다.


윤동주문학관과 가까이 있는 시인의 언덕은 이번에 처음 가봤다. 5분 거리도 안되게 가까워 조금 놀랐다. 문학관 옆 계단 길을 조금 올라가면 높지 않은 자그마한 언덕 위에 안내석과 '서시' 시비가 있다.

내려오는 길에 들른 산속 카페에서 점심으로 빵과 커피를 먹었다. 문학관에서 시인의 언덕 가는 길 중간에 있는데 언제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카페에서 직접 구웠다는 빵과 커피가 의외로 괜찮다.


윤동주문학관 건물 전면에 전시되어 있는 '새로운 길' 시를 소개한다.



새로운길


(1938.5.10)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길 새로운길


문들레가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길은 언제나 새로운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 윤동주기념관

(서대문구 연세로 50 연세대학교 핀슨관)



윤동주기념관과 관련한 내용은 윤동주기념관 사이트를 참고해서 작성했다.


윤동주기념관은 윤동주가 연희전문 재학시절 거주한 당시 기숙사인 핀슨관을 보존 및 개선하여 설립된 장소다. 유족이 기증한 1,000여점의 유품 및 원본을 기반으로 구축되었고 1층 전시관 (6개의 상설 전시와 1개의 기획 전시), 2층 라이브러리 (윤동주와 관련된 출판물들), 3층 시몬느 홀 (강연, 문화 행사 등)로 구성되었다.


개관이 의외로 늦었다. 2020.12.30 개관했다. 북간도 화룡현 명동촌에서1917.12.30 출생한 윤동주의 생일에 개관 일자를 맞췄다. 코로나 사태로 사전 예약을 통한 소수의 인원만 방문이 가능하다가 이 글을 쓰고 있는 2021년 4월 현재 방문 관람은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이번에는 방문하지 못했다.


역시 사이트에 따르면 핀슨관은 1922년 준공된 고딕 양식의 건물로 다인실 기숙사로 사용되었고 윤동주는 3층 다락방과 2층 기숙방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 윤동주평전

(송우혜 작가, 2014년 제3차 개정판, 서정시학)




앞서 밝힌 대로 서촌의 역사 속 인물 탐구로 윤동주를 택한 건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 점을 깨닫게 해준 것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글의 동력을 제공한 것도 역시 송우혜 작가의 윤동주평전(이하 평전)이다.


송우혜 작가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서울대 의대 간호학과를 중퇴하고 신학과를 거쳐 한국사를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작가 등단 후 한국문학 신인상 등을 수상했다. 장 단편 소설, 인물평전, 독립운동사 논문 등을 집필해왔다.


윤동주평전의 경우 출판사의 집필 요청을 계속 거절하다 결국 쓰게 되는데 1988년 초간본을 집필한 이후 오랜 기간 추가 연구를 통해 개정판들을 집필해왔다. 특이한 점은 송우혜 작가가 뒤에 소개할 윤동주의 친구인 송몽규와는 친척이란 사실이다. 다만 송몽규의 죽음 이후 출생했다.


분명히 밝혀두지만 이 글은 평전의 내용을 필요한 부분에 요약 인용하거나 평전의 내용을 참고해서 쓴 글에 불과하다. 따라서 보다 정확하고 풍부하게 윤동주와 친구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윤동주평전(592p)을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평전에서 윤동주의 친구들이 소개되는데 그중에서 송몽규와 강처중 두 사람이 유독 인상적이다. 윤동주의 죽마고우이면서 그와는 약간(?) 다르게 살아간 친구들이다.


어떤 사람을 알려면 친구를 살펴보라는 말이 있다. 친구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인 윤동주의 전형을 벗어나 그의 진면목에 좀 더 다가갈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윤동주의 두 친구 송몽규와 강처중을 소개한다.



송몽규


송몽규는 1917.9.28 북간도 명동촌에서 출생했다 (윤동주는 같은 마을에서 1917.12.30 출생했다). 어머니는 '윤신영'으로 윤동주의 고모다. 따라서 송몽규와 윤동주는 고종사촌간이다.


유년시절부터 소학교, 중학교,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유학까지 윤동주와 함께하다 독립운동 혐의로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어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나란히 옥사한다.


송몽규는 중학교 3학년인 193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될 정도로 글 재능도 있었다. 특이한 점은 그해 3월에 4학년으로 진급하지 않고 단신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일본 경찰이 송몽규를 취조한 문서가 뒤늦게 발굴되었는데 평전에 아래와 같이 소개되어 있다.


'(송몽규는) 1935년 4월 은진중학교 3학년 때 19세의 나이로 당시 남경에 잠복하고 있던 조선독립운동단체인 김구 일파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참가할 목적으로 동년 11월까지 그곳에서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나 김구 일파의 내부사정으로 말미암아 목적 달성이 어려울 것을 알게 되자 다시 제남시에 있는 이웅이라는 독립운동자를 찾아가 함께 독립운동을 펴려고 하였으나 사찰 당국의 압박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1936년 3월 출생지의 부모 곁으로 돌아왔다.'


평전의 연구에 따르면 송몽규는 임시정부 군관학교 2기에 지원한 것이었다. 임시정부 군관학교는 중국 정부 중앙군관학교(남경 소재) 산하 낙양 분교에 김구 등이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설치한 조선인 대상 교육반이었다. 따라서 중국 중앙군관학교의 교육 인프라를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정 군관학교는 1기 생을 배출한 후 송몽규를 포함한 2기 생을 받아들였으나 중국에 대한 일본의 압력(당시는 본격적인 중일전쟁 전이었다)으로 2기 생부터는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직접 입교시킬 수 없게 된다. 할 수 없이 인근 민가와 사찰 등에서 미흡한 교육이 이루어지다 중국 정부의 재정지원마저 중단되며 6개월 여 만에 해산하게 된다. 송몽규는 그 후에도 독립운동을 이어가기 위해 고군분투했음을 일본 경찰의 자료가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평전에 따르면 이때 송몽규가 감행했던 중국 행이 훗날 송몽규와 윤동주를 일본 감옥에서 옥사하게끔 몰아간 원인이 된다. 이때부터 일본경찰은 송몽규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감시하다가 결국 일본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포하고 둘은 나란히 감옥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만약에 중국 정부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거나 김구 등 선배 독립 운동가들이 대안을 찾을 수 있었다면 송몽규와 윤동주의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송몽규가 19세 나이로 지원한 임정 군관학교 2기를 무사히 마치고 뒤이어 항일무장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 아이들이 국사 시간에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그은 송몽규 장군에 대해 배우고 우리들이 교보문고에 가면 한국인 최초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윤동주의 해방 후 작품(어쩜 소설도)도 볼 수 있었을까?




강처중


강처중은 윤동주, 송몽규와 연희전문학교 동기로 셋은 1917년 동년배다. 기숙사 생활을 같이한 윤동주, 송몽규, 강처중은 핀슨관 3인방으로 불렸다.


현재 남아 있는 윤동주의 시와 유품은 유족, 정병욱(윤동주의 연대 후배) 그리고 강처중이 소중히 보관해온 것이다. 해방 후 강처중은 경향신문 기자로 일하며 작고한 윤동주의 시를 경향신문 지면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소개했다. 1948년에는 윤동주의 유고 시집이자 첫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 발간을 주도하고 발문을 작성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강처중은 없는 사람이었고 초간본의 발문 역시 1955년 증보판부터는 삭제되고 출간된다. 그 이유는 강처중이 6.25전쟁 직전 남로당 핵심 간부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기 때문이다.


평전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사실과 다르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사형을 기다리던 강처중은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풀려났다고 한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잠시 요양한 강처중은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아내에게 남기고 집을 떠나 월북 했다고 하며 그 후의 행적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이 없다.


윤동주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으며 집안의 지원으로 일본 유학까지 갈 수 있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 강처중의 입장에서는 부르조아 지식인이며 시대 참여가 부족한 나약한 시인으로 볼 여지도 충분했다. 그러나 강처중은 윤동주가 살아있을 때는 물론이고 죽은 후에도 그의 시와 그의 진면목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정성을 다했다. 아마도 본인의 사상과 관계없이 아니 본인의 사상을 뛰어넘는 윤동주의 진면목을 몸소 체험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평전에 따르면 강처중의 글은 현재 2개만 남아있는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의 '발문'과 경향신문 기사인 '충무공' 이다. 두 글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며 윤동주와 친구들에 대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강처중이 본 윤동주의 진면목, 강처중 본인의 사상을 짐작할 수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년 초간본 '강처중' [발문]


동주는 별로 말주변도 사귐성도 없었건만 그의 방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아모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동주 있냐" 하고 찾으면 하던 일을 모두 내던지고 빙그레 웃으며 반가히 마조앉아주는 것이었다.

"동주 좀 걸어보자구" 이렇게 산책을 청하면 싫다는 적이 없었다.


=중략=


"동주 돈 좀 있나" 옹색한 친구들은 곳잘 그의 넉넉지 못한 주머니를 노리었다. 그는 있고서 안 주는 법이 없었고 없으면 대신 외투든 시계든 내주고야 마음을 놓았다. 그래서 그의 외투나 시계는 친구들의 손을 거쳐서 전당포 나드리를 부즈런이 하였다.


=중략=


불러도 대답 없을 동주 몽규었만 헛되나마 다시 부르고 싶은 동주! 몽규!




경향신문 1947.4.27 '강처중'


충무공 이순신


=중략=


왕과 지배 관료들이 서울을 떠날 때 민중들은 왕이 자기들을 버리지 말고 함께 서울을 고수할 것을 애원하였다. 그러나 =중략= 암야에 그들은 도망치듯 민중 모르게 떠났다. 이것을 안 민중들은 증오하는 나머지 원부 장예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고 송도에서는 왕에게 투석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어떠하였던가.


그가 종적죄로 나포되어 함거에 실려 서울로 갈 때 열읍 길가에는 남녀노유 민중들이 모여 통곡하였다. 또 절망하였다. 그가 다시 놓이어 통제사로 재임되어 임지로 나려갈 때 민중들은 연도에 운집하여 호장을 바치며 울고 환영하였다. 또 안도하였다. 이순신도 그들을 위로하였다. 얼마나 천양의 대조인가. 그가 위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오늘날 후인들이 이순신을 사모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시호 충무공으로 이 글을 쓰지 않고 이순신으로 작고 성명하는 것도 그가 인민과 함께 지금도 살아 있으므로서 더 다정을 느끼는 까닭이다. 충무공 시호를 나린 왕은 이미 갔으되 이순신 장군을 부르며 따루고 믿던 인민은 여전히 멸치 않고 있는 까닭이다.


(끝)

1 Comment


이수만 TV
이수만 TV
Jun 22, 2021

인왕산을 가기 위해 서촌에 자주 오는데 윤동주문학관만 잠시 들렀지 하숙집터도 생소하네요. 윤동주의 지인까지 잘 적어 주셨네요. 윤동주시인에 대해 좀더 알아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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